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르투갈 왕국 (문단 편집) === 카스티야 왕국의 침략과 격퇴 === 페르난두 1세 사후, 페르난두 1세의 아내이자 '''[[베아트리스(포르투갈)|베아트리스]]'''의 어머니인 레오노르 텔레스가 베아트리스와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카스티야)|후안 1세]]를 공동 왕으로 추대하고 두 사람의 이름으로 섭정을 시작했다. 여기에 레오노르의 연인인 주앙 페르난데스 안데이루가 재상으로 선임되었다. 후안 1세는 페르난두 1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몬탈반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베아트리스와 자신을 포르투갈의 통치자로 선포하는 내용의 선언서를 포르투갈 전역에 보내고 알폰소 로페스 데 테하다를 포르투갈 총독으로 선임해 [[리스본]]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득권이 훼손될까 두려웠던 포르투갈 상인 계급은 자국이 카스티야 왕국에 병합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백성들을 선동해 11월 말부터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1383년 12월 6일 아비즈의 영주이자 페르난두 1세의 이복 동생인 [[주앙 1세|주앙]]이 포르투갈의 섭정 레오노르의 애인인 주앙 페르난데스 안데이루를 암살하면서 반란의 기세가 더욱 거세졌다. 알바로 파리스의 선동에 넘어간 백성들이 리스본에서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켜 카스티야의 앞잡이로 간주된 리스본 주교 마르티뉴 아네스(Martinho Anes)를 살해한 뒤 주앙 왕자를 지도자로 옹립했으며, 포르투갈 제독 란사로테 페사냐도 베자 시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일으키고 포르투갈 국왕을 자칭했다. 알바로 파리스는 레오노르에게 주앙 왕자와 재혼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녀는 이를 거부하고 산타렝으로 도주한 뒤 후안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후안 1세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포르투갈의 상황을 안정시키기로 마음먹고 베아트리스와 함께 산타렝으로 진격했다. 1384년 1월 13일 산타렝에 도착한 그는 레오노르로부터 사임 각서를 받아내고 많은 기사와 성주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얻어냈다. 이후 4월 6일 아톨레이오스 전투에서 카스티야 장군 페르난도 산체스 데 토바와 포르투갈 귀족 페드루 알바스 페레이라가 이끄는 카스티야군이 누누 알바레스 페레이라가 이끄는 포르투갈 반란군과 처음으로 맞붙었다. 카스티야 기병대는 이 전투에서 정사각형 방진을 세운 적군을 향해 무작정 돌진했다가 큰 손실을 입고 패퇴했다. 1384년 5월, 후안 1세는 군대를 정비한 뒤 리스본으로 진격해 육지와 해상 모두 봉쇄했다. 그러나 리스본 공략은 쉽사리 이뤄지지 않았고, 누누 알바레스 페레이라는 카스티야에 충성하는 도시들을 습격하고 침략군의 후방을 교란했다. 한편 주앙 1세는 잉글랜드 왕국에 사절을 보내 동맹을 맺자고 요청했다. 당시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인 17세의 [[리처드 2세]]를 대신해 국정을 주관하던 랭커스터 1대 공작 곤트의 존은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 왕국을 지원한 카스티야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포르투갈에 지원군을 보내기로 했다. 1384년 7월 18일, 루이스 페레이라 제독이 이끄는 포르투갈 함대가 테호 해전에서 카스티야 해군과 격돌했다. 루이스 페레이라는 이 해전에서 전사했지만, 포르투갈 함대는 적의 해상 봉쇄를 뚫고 리스본에 도착해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던 주민들에게 귀중한 보급품을 전달했다. 후안 1세는 이후에도 리스본을 계속 포위했지만, 누누 알바레스 페레이라가 보급로를 교란하면서 보급품이 부족해지고 진영에 [[페스트]]가 돌면서 수많은 병사가 죽어가자 어쩔 수 없이 9월 3일에 봉쇄를 풀고 카스티야로 철수했다. 그렇지만 리스본 외 다수의 포르투갈 지역은 카스티야군에게 넘어갔다. 1385년 4월 6일, '''[[주앙 1세]]'''는 코임브라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귀족, 성직자, 시민 대표들의 추대를 받아 포르투갈 국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누누 알바레스 페레이라를 포르투갈군 총사령관으로 선임하고 카스티야군에 넘어간 지역을 모조리 탈환하게 했다. 여기에 잉글랜드군 600명이 포르투갈에 상륙했다. 이들 전원이 백년전쟁에서 활약한 베테랑으로, 대 기병 전술에 특화되어 있었기에 강력한 기병을 앞세운 카스티야군을 상대하는 법을 포르투갈인들에게 전수할 수 있었다. 후안 1세는 주앙 1세가 포르투갈 국왕을 칭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해 원정군을 파견했다. 이들은 비세우를 철저하게 약탈하고 포르투갈인들을 상대로 잔학 행위를 저질렀지만, 1385년 5월 29일 트랑코소 전투에서 대패해 지휘관 7명 중 6명이 사망할 정도로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후안 1세는 6월에 대군을 일으켜 셀로리코 다 베이라에서 코임브라와 레이리아에 이르는 포르투갈 중북부로 진격했다. 원정군 규모는 32,000명에 달했는데, 그 중엔 프랑스 중기병들도 있었다. 주앙 1세와 누누 알바레스 페레이라는 이에 맞서 6,500명 가량의 병력을 일으켜 토마르 시에 집결했다. 이후 적을 어찌 맞서 싸울 지 논의한 끝에, 리스본에서 또다시 농성한다면 이번에는 버티기 어려우니 알주바호타 마을 인근에서 적을 물리치기로 결의했다. 1385년 8월 14일, 험준한 산악 지형을 통과해야 하는 데다 숫자가 워낙 많아서 매우 느린 속도로 진군하던 카스티야군은 알주바호타 고지에서 포르투갈-잉글랜드 연합군을 발견했다. 후안 1세는 즉각 돌격 명령을 내렸지만, 무더운 날씨에 오래도록 행군하느라 지칠대로 지친 기사들과 장병들은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반면에 시원한 고지에서 기다리고 있던 포르투갈-잉글랜드 연합군은 전면에 [[마름쇠]] 등 대기병 방어 구조물을 세우고 장궁병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적 기병대를 물리쳤다. 카스티야군은 [[축차투입]]을 반복해봤지만 하루종일 적의 전열을 뚫지 못하다가 제풀에 지쳐 퇴각했다. 이에 포르투갈-잉글랜드 연합군은 도망치는 적을 추격해 카스티야군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알주바호타 전투]]에서 포르투갈-잉글랜드 연합군이 천 명 이하의 손실을 입은 것에 비해, 카스티야군은 5천 가량의 손실을 입었다. 게다가 카스티야군은 본국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포르투갈인들의 연이은 습격으로 인해 5,000명을 추가로 상실했다. 누누 알바레스 페레이라는 여세를 이어가 1385년 10월 카스티야 영토에 있는 메리다를 공격했고, 발베르데 전투에서 카스티야군 2만 명을 격파하고 적장 페드로 무네스 데 고도이 이 산도발을 주살했다. 그 후 주앙 1세는 카스티야 국왕이 되기 위해 [[갈리시아]]에 상륙한 제1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카스티야 왕국군이 존과 맞서느라 포르투갈 왕국에 원정군을 파견할 엄두를 못 내게 만들었다. 이리하여 카스티야 왕국의 간섭에서 벗어난 포르투갈 왕국은 주앙 1세가 창시한 아비스 왕조의 통치를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